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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회로, 아퀴 레이블의 컴필레이션이자 현재까지의 마지막 정규 앨범 "전조"를 들어보았습니다. 사실 발매 당시에도 몇 번 들었지만 그때는 크게 집중은 못 했으니, 진짜로 감상한 건 최근에 들어서야 가능했던 것 같네요.
1.
전북에서 P. Plant, UnBomber, Somalia, TriggaEffect 등의 몇몇 친구들이 의기투합하여서 2006년 UnBomber의 EP로 출발한 아퀴는, 그동안 대박은 터뜨리지 못 해도 꾸준히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멤버들의 앨범을 내놓으면서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려왔습니다. 그들의 작품과 행보를 살펴보노라면 힙합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여러 곳에서 돋보입니다 - 어떤 면으로는 Market No.1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되는 레이블입니다.
그들의 열정이 모여 결정체를 이뤄 나온 컴필레이션 '전조'는, 아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으나, 결국 냉정하게 말해 마지막까지 대박을 일궈내는 데는 실패했고, 사정이 있겠지만 이후로는 그들의 활동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JF Connection 앨범과 The Sophist 앨범의 UnBomber의 참여, 그리고 2010년 나온 UnBomber의 "No Doubt"이라는 디지털 싱글이 있긴 합니다).
2.
한국 힙합 리스너로써, 끊임없는 도전에도 불구하고 기대한만큼의 빛을 보지 못하는 아티스트들을 볼 때는 안타까움을 먼저 느낍니다. 생각보다 앨범의 퀄리티보다는 신인들을 먼저 찾지 않는 리스너의 게으름과, 자본이나 현실 등의 이유로 인한 홍보 부족이 많은 이유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샌가 맘대로 끝내버린) "이 앨범 아십니까"라는 글도 쓰곤 했는데, 지금도 별로 사정은 바뀌지 않은 듯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이유만으로 앨범의 부진 이유를 탓할 수 있는지는 더 생각해봐야할 일입니다.
3.
아퀴의 메인 멤버라 할 수 있는 UnBomber, Somalia, P. Plant (그리고 좀더 포함시키면 Merci나 Ghetto-S = G.minor, 2RYU 등)는 저마다의 주무기가 있습니다. UnBomber의 뛰어난 라임 실력, Somalia의 개성적인 플로우, Merci의 두꺼운 목소리, P. Plant의 웅장한 샘플링 등... 멤버들은 자신의 이런 장점을 잘 알고 맡은 파트에서 이를 무기로 삼아 최대한 활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주무기 외의 다른 것들은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랩씬에서 성공한 래퍼들은 한 분야에서만 잘 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화나가 아무리 라임으로 대표되는 래퍼라도, 그의 톤과, 플로우와, 메세지가 뒷받침되지 못했다면 성공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조" 앨범은 들으면 들을수록 기초가 부실한 랩을 듣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UnBomber의 랩은 어느 곡을 들어도 라임은 눈에 띄는 높은 수준을 보여주지만, 그 외의 톤 운용이나 플로우에서는 어떤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The Lineup"이나 "교전" 등에서 보이는 공격적인 톤을, "찬반양론", "Remember That"에서도 그대로 갖다쓰고 있죠. 또, 자신의 라임을 너무 강조하려는 노력이었는지, 발음이 필요 이상으로 딱딱해지고 어색하게 들리는 면도 있습니다.
나머지 래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Somalia는 박자에 구애받지 않는 듯이 달리는 플로우가 장점이나, 오히려 박자 감각이 뒷받침해주지 못해, 어느 부분에서는 엇박을 넘어 그저 박자를 저는 걸로 밖에 들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의 톤 역시 대부분에서 유지되는 하이톤은, 그의 특유의 플로우에 무척 어울린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앨범 내내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자유로움이 아닌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Round 1"에서 그가 잠시 보여준 톤이 그에게는 아주 좋은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Merci 역시 멋진 톤을 뒷받침해줄 발음과 박자, 플로우가 부족해 재미없는 랩이 되버렸죠.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주무기마저 갖추지 못한 래퍼들의 경우입니다. 이번 앨범으로 처음 목소리를 실은 JayM, 김사장, Rapiyong의 경우에는 랩스킬 전반에 걸쳐 많은 발전의 여지가 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글의 제목이 가장 마음에 다가오는 부분입니다. "열정 하나로? 열정 하나만으로?"
오히려 이때까지 눈에 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KG라는 래퍼가 "전조"에선 가장 귀를 잡아끕니다. 그 역시 주무기라고 할만한 것은 없지만, 반대로 그는 전반에 걸쳐 기본을 탄탄하게 잡은 느낌입니다 - 노력할 여지는 있지만, 어쨌든 기초가 잡히니 듣기 편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4.
그렇다면 이 앨범에서 "열정"은 정말로 보이는가?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듀서가 두 명 뿐이었던 것도 기여했지만, P. Plant와 Heman은 "전조"가 타겟으로 잡은 90년대 골든 에라 힙합을 재현하려 노력했고, 앨범의 통일성을 보장했습니다. 트랙 하나하나의 주제는 뚜렷하며, 단순히 스웨거나 wack MC diss 같은 뻔한 주제가 아닌 다양한 주제를 잡으려했던 흔적이 보이고, 트랙을 맡은 래퍼들도 각자의 가사 메세지를 주제에 충실하게 잘 잡았습니다. 곡 내의 벌스의 구성이나 트랙의 순서 배치 등의 세부적인 부분에도 꼼꼼하게 노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5.
뜬구름 잡는 얘기일 수 있지만 "언더그라운드 정신", 이것을 논한다면 아퀴는 여타 아티스트들보다 훨씬 충실한 이들입니다. 다만, 그러한 열정을 뒷받침해주는 스킬을 기르는 것이 이들의 우선 과제일 것입니다. 이 앨범 이후로 활동이 확 침체되었으나 계속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얘기는 믿을만한 소식통을 통해 들려오고 있는데, 부디 발전된 모습으로 더 많은 이들의 귀를 잡아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